인텔은 왜 ARM 프로세서 위탁생산을 맡았나

인텔이 ARM 기반 프로세서의 위탁생산, 즉 파운더리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그 동안 모바일과 센서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 구도에 있던 두 회사가 손을 잡은 셈이다. 아니 ‘다시 손을 잡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일단 IDF에서 발표된 내용을 보자. 인텔과 ARM은 손을 잡고 인텔의 공장에 ARM의 아티산(Artisan) 기반 기술을 도입한다. 파트너들이 이를 자유롭게 완제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게 발표의 핵심이다. 인텔과 ARM은 모바일과 사물인터넷용 프로세서를 위탁 생산할 계획이다. 즉 코어텍스 A와 M 기반 설계 제품들이 주를 잇게 될 것으로 보면 된다.

먼저 발표된 파운드리 이용 기업은 세 곳이다. LG전자는 10nm 공정을, 스프레드트럼은 14nm, 아크로닉스반도체는 22nm를 이용한다. 2020년이면 LG전자는 인텔이 생산한 뉴클런 모바일 프로세서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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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은 왜 파운드리 사업을 확장하는 것일까? 먼저 반도체 시장의 구조를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는 설계와 생산이 분리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는 말은 한 회사가 모든 것을 다 도맡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텔의 코어 프로세서나 삼성의 엑시노스 프로세서는 설계와 생산까지 직접 다 하는 예지만 애플의 A시리즈, AMD의 비쉐라 프로세서나 엔비디아의 파스칼 GPU, 퀄컴의 스냅드래곤 등은 설계만 각 회사에서 하고 생산은 TSMC나 삼성전자, 글로벌파운드리 등의 공장, 즉 파운드리에서 이뤄진다.

ARM은 대표적으로 기반 설계만 그리는 회사다. 대부분의 모바일 프로세서 기업들은 ARM에서 설계 도면을 받아 자체적인 설계를 마친 뒤 파운드리에 위탁해서 생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ARM은 고객사들이 파운드리에서 쉽게 완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각 파운드리들과 기술 제휴를 해서 생산과 관련된 노하우들을 미리 준비해두곤 한다. 그렇게 삼성전자를 비롯해 TSMC, 글로벌파운드리 등이 모두 ARM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그 안에 인텔도 끼게 되는 셈이다. 인텔도 ARM과 함께 생산 수율을 높이는 고민을 함께 하게 됐고, ARM의 고객사들이 인텔의 공장을 이용해서 효율적으로 완성칩을 찍어낼 수 있다. 인텔은 ARM의 사물인터넷 플랫폼인 아티산 피지컬IP도 품었다. 사실상 최고의 파트너십을 맺은 셈이라고 보면 된다.

인텔은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아톰 프로세서의 모바일 시장 안착 실패에 대한 인정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텔의 사업 확장 목표 중 하나는 파운드리 비즈니스다. 사실 인텔의 ARM 파운드리 방식이 미리 예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크게 이슈가 되진 않았지만 인텔은 지난 2014년 ARM 기반 모바일 프로세서를 만드는 록칩과 계약해 파운드리 방식 생산을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인텔의 사업 한 축에는 지속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이 있었다. 록칩은 그 가능성을 살피는 사례가 됐고, 이번 제휴는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인텔은 반도체 설계 기업인 동시에 생산 기업이기도 하다. 생산을 통한 수익 구조 개선도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상 지금 인텔 수준으로 복잡한 구조의 미세 공정 반도체를 찍어낼 수 있는 회사는 흔치 않다. 인텔이 코어 프로세서나 제온 프로세서에 도입하는 반도체 생산 기술에 비하면 ARM 기반 프로세서의 생산 환경은 거저 먹는 수준일 수 있다. 경쟁 관계를 떠나 이 시장을 놓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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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과 ARM 사이의 애증 관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쳐지나간다. 사실 ARM의 성장에는 인텔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저전력 칩 설계에 몇 가지 갈래가 있었는데, 인텔은 ARM의 핵심 파트너였다. 인텔은 펜티엄 외에도 ‘스트롱 암’이라는 브랜드의 ARM 프로세서를 직접 설계, 생산했던 바 있다. 이 칩은 윈도우CE를 비롯한 PDA에 들어가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고,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모바일 프로세서의 표준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ARM 프로세서는 수익이 나지 않았다. 칩 자체가 워낙 쌌고, PDA의 성장은 주춤했다. 스마트폰이 이렇게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결국 인텔은 2006년 ARM 프로세서 사업을 마벨에 매각하는 것으로 두 회사의 관계는 정리됐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했고 모바일 프로세서의 폭발적 성장은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후 인텔은 아톰 프로세서로 다시 모바일 시장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지만 시장의 흐름을 바꾸는 건 인텔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올 초 인텔은 스마트폰용 아톰 프로세서를 조용히 정리했고, 결국 파운드리 확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업적으로 그게 훨씬 나은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반도체 사업은 설계와 생산이 더 분리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소설을 하나 써보자면 인텔의 진짜 속내는 애플이 아닐까. 인텔은 최근 모바일 프로세서보다 모뎀 쪽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인텔은 5세대 이동통신(5G)에 그 어느때보다 열을 올리고 있다. 벌써부터 애플이 올해 아이폰에 인텔 모뎀을 쓸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가능하다면 모뎀과 프로세서를 통합하는 것은 기판 설계부터 원가 절감까지 이점이 있게 마련이다. 인텔이 애플의 A프로세서를 찍는 파운드리가 되고, 모뎀을 꿰찰 수 있다면 굳이 직접 프로세서를 개발,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시장성을 노릴 수 있다. 아직 이런 징조는 보이지 않지만 인텔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노려볼 만도 하다.

인텔의 파운드리 비즈니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반도체 공정 설계는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파운드리에서 나오는 수익 자체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인텔이 메모리 분야에 다시 사업을 확장하는 것 역시 공정 기술의 확대로 연결지을 수 있다. 설계 뿐 아니라 생산면에서도 단연코 최강자 위치에 서 있는 인텔에게 어쩌면 파운드리 비즈니스는 당연히 찾아와야 했던 일이고, 이제 그 단계를 밟아가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최호섭 기자> hs.choi@byline.network

※이 기사는 동아사이언스와의 제휴에 의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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