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석의 입장] 방통위의 이상한 ‘잊혀질 권리 가이드라인’

delete button on a computer keyboard방송통신위원회가 최근 이른바 ‘잊혀질(잊힐) 권리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이 가이드라인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일반적인 잊혀질 권리와 전혀 상관 없는 생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단 잊혀질 권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유럽에서 잊혀질 권리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것은 스페인의 한 변호사로부터 시작됐다. 이 변호사는 자신에 대한 15년전 신문기사가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유럽사법재판소(ECJ)는 그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고, 구글은 그 신문기사를 검색DB에서 지워야 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10개월동안 21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유럽내에서도 잊혀질 권리는 아직 찬반이 엇갈린다. 잊혀질 권리는 알권리와 상충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통위 가이드라인이 얘기하는 잊혀질 권리는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방통위의 가이드라인의 정식명칭은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안)’이다. 스페인의 변호사는 신문기사, 즉 남이 올린 게시물의 검색배제를 요구했다. 그런데 방통위 가이드라인은 ‘남이 올린’ 게시물이 아닌 ‘내가 올린’ 게시물에 대한 잊혀질 권리를 다루고 있다.

786287_20160327135359_173_0006.jpg일반적 상황에서는 내가 올린 게시물의 노출을 원치 않으면, 그냥 삭제하면 된다. 자기가 올린 글이니까, 언제든 삭제할 수 있다. 잊히고 싶으면 얼마든지 잊힐 수 있다. 이 때문에 방통위의 가이드라인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정된 것일 수 밖에 없다.

몇 가지 특수한 경우가 있긴 하다. 일례로 자신이 올린 글을 삭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이트가 있다.

휴대폰 커뮤니티인 ‘뽐뿌’ 장터 게시판에는 글을 올리면 6개월 동안 삭제하지 못한다. 이는 뽐뿌 장내에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사기행위를 막기위한 불가피한 규제다. A회원에게 사기친 후, 글을 지우고(증거인멸) B회원에게 사기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기꾼은 아마 자신이 쓴 글들이 잊히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과연 이 사기꾼의 잊혀질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가이드라인(이후 시행령으로 격상 예정) 씩이나 만들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탈퇴한 회원이 쓴 옛날 글을 지우려고 할 때도 잊혀질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보통신망법은 탈퇴한 회원정보를 1년 이후 폐기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즉, 탈퇴 1년 후에는 회원정보를 다 폐기했기 때문에 게시물을 쓴 올린 사람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다. 누군가 자신이 쓴 글을 지워달라고 요청해도, 그 사람이 진짜 그 게시물을 작성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정보통신망법의 주무부처는 바로  방통위다.

물론 방통위의 가이드라인이 무조건 다 쓸모 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조항은 찬반이 엇갈릴지언정 논의 해볼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사자(죽은 사람)의 게시물 처리 등에 대한 내용은 앞으로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본인이 올린 글을 지우지 못해 큰 피해를 입는 사례는 흔치 않고, 사회적 이슈가 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찬반이 엇갈리는 가이드라인을 급하게 밀어부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방통위는 왜 타인이 올린 게시물이 아닌 자기 게시물에 대한 잊혀질 권리를 주장할까?

그건 우리나라에 그 어느 국가보다 강력한 잊혀질 권리가 이미 법제화 돼 있기 때문이다.

monkey-557586_640.jpg바로 ‘임시조치(블라인드)’다. 정보통신망법에 따르면, 누군가 사생활침해나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게시물 삭제를 요청하면, 인터넷 업체들은 곧바로 게시물이 노출되지 않도록 블라인드 처리를 해야한다. 스페인 변호사처럼 검색에서 지워달라고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원본 게시물을 삭제하는 강력한 효과가 있다.

이미 이처럼 강력한 잊혀질 권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그 동안 국내에서는 잊혀질 권리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다.

방통위의 걱정처럼 본인 게시물을 삭제하지 못해 피해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이런 피해를 구제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의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회문제가 된 적도 없고, 다른 국가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세계적으로 전혀 논의되지 않은 주제를 우리만 성급하게 제도화 할 경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내 인터넷 환경을 다시 갈라파고스로 만들 수 있다.

방통위가 성과주의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면, 차분히 시간을 두고 논의해도 되는 문제다.언제나 급히 먹은 밥이 체하는 법이다. 천천히 물 마셔가면서 먹자.

글. 바이라인 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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