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은 아닙니다만] 사랑과 록큰롤이 전부인 사이보그를 기대하며

_-600-jpg.jpg태초에 인간은 두려움을 아는 존재였다. 천둥과 번개가 무서웠고, 자연을 움직이는 신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신 아래 인간은 모두 평등한 자여서 제아무리 권력자라도 질병과 죽음 앞에선 속절없었다. “순리대로”. 그저, 순리대로 사는 게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였다.

순리는 현대과학의 발달로 깨졌다. 두려움은 미지의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것인데, 웬만한 것은 과학으로 증명했다. 번개가 왜 치는지, 파도가 왜 높은지 자연의 신비를 한 꺼풀씩 벗겨냈다. 오히려 ‘모른다’는 사실이 지식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고, 무지를 인정할수록 인간의 능력은 커졌다.

그러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질의 생물예술가인 에두아르도 카츠는 지난 2000년 새로운 예술작품을 창조하기로 결심했다. 녹색 형광 토끼였다. 그는 프랑스의 연구소와 접촉해, 자신의 설계대로 토끼가 빛을 내도록 유전자 조작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돈을 받은 연구소는 지극히 평범한 흰토끼의 배아에 녹색 형광을 발하는 해파리 유전자를 삽입했다. 그러자 짜잔! 녹색 형광 토끼 한 마리가 탄생했다. 카츠는 이토끼에 ‘알바’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피엔스 中>

최근 한국에 번역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 대목을 쓰면서 ‘생물예술가’ ‘새로운 예술작품’ ‘설계’ 등의 단어를 썼다.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생물’을 언제든 조작 가능한 대상의 단계로 받아들였다. 토끼로 시작한 생명체에 대한 변형은, 물론 토끼에만 머무르진 않을 것이다. 하라리는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많은 가능성의 문이 너무나 일찍 열리고 있고 우리의 유전자 조작 능력은 선경지명을 갖고 이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할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고 느낀다”고 지적했다.

유전자 공학만큼이나 불안함을 주는 기술 발전이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사람처럼 사고하는 프로그램, 또는 로봇은 언제든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 일종의 ‘뇌 확장 프로젝트’는, 지적으로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한다.

과학 이전은 성경의 시대였다. 성경은 하느님(신)의 권위를 말한다. 창조주 하느님이 절대 권력을 갖고 있고, 인간은 그를 두려워하고 복종한다. 신이라는 것은 그러한 존재다. 인간은 AI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를 두려워한다. 인간은 로봇을 복종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권력은 언제든 전복될 수 있다.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인간의 기본 사고 능력부터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우세다. 현실에선 항상 아버지는 늙고 아들은 자란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 종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고했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도로 새로운 종을 설계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다. 그리고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란 걱정에 앞서, “우리 종(호모 사피엔스) 자체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때다. 처음엔 인간을 닮게 설계되었으나 이후엔 얼마나 진화할지, 지금의 사피엔스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를 말이다.

유발 하라리가 진짜 하고픈 말은 이거였던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하라리의 입을 빌리자면,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사피엔스의 종말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사피엔스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하라리의 말처럼 “사피엔스를 뛰어넘은 최초의 사이보그들은 인간 설계자의 문화적 아이디어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운이 좋아 계속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이 지적은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과 록큰롤이 전부인 사이보그는 어떤가. 이들은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입지 않아도 춥지 않다. 생존을 위해 굳이 환경이나 다른 종을 파괴할 필요가 없다. 그저 우주를 떠돌다 마음에 드는 로봇을 만나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노래하고 예술을 하는 게 전부인 새로운 종. 마지막 사피엔스가 될지 모를 우리가 어떤 욕망을 프로그래밍하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지상 최강의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인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하라리처럼, 나도 묻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욕망을 가지도록 디자인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년 11월.

글. 바이라인 네트워크
<스밀라>   snow.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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